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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권혁길 2017-10-27 추천 0 댓글 0 조회 1133
[성경본문] 로마서1:17 개역개정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오직 의인은(1:17)

작성자 : 권혁길 목사(부산 은광교회)

2017. 10. 29.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종교개혁(宗敎改革)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신학운동으로 루터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종교개혁 이전의 칼케돈파인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비칼케돈파인 오리엔트 정교회와 신교 혹은 개신교로 불리는 장로교, 개혁교회,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등의 교파로 분리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였던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그리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앙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열정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존 칼빈에 의해 신학적으로 완성되어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현실을 바라보면 500년 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그 시절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일각에서는 종교개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외칠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 기독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는 큰 타이틀을 가지고 무엇을 시도하기보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모습으로 돌아갈까?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을 중심하여 은혜를 나눈다.

 

1. 오직성경

* 진리를 분별하는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카톨릭에서의 시행되어지고 있는 면죄부 판매가 성경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씀을 근거한 개혁을 시도했다.

* 이처럼 모든 상황에서 진리냐 비진리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기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고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지식과 내 주관대로 살고 있는가를 말씀의 잣대를 기준하여 분별해야 한다.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그리스도 교리의 원천이며 표준이다. 성경 밖에서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칼빈은 말하기를 말씀이 가라는 곳 까지 가고 말씀이 서라는 곳에서 서야 한다고 했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인도하신다.

* 성경은 인생의 사용 설명서

세상의 모든 제품에는 반드시 사용설명서가 있다.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인간인데 사용설명서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성경이 곧 인간 사용설명서다. 모든 제품이 설명서대로 사용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 성경은 인생의 내비게이션

시편 11910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다. 목적지를 정해 놓으면 거리, 시간, 코스, 속도, 방향 모두를 안내하기 시작한다. 현재 속도를 알려주고, 과속 여부도 알려주고, 과속 사진 찍히는 곳도 미리 신호를 주어 피하게 한다. 앞으로 얼마쯤 가서 오른쪽으로 나가야 하는지, U턴 을 해야 하는지 미리 다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또 다른 길을 탐색하여 금방 다시 알려주는데 수십 번을 잘못 가도 절대 큰소리치거나 핀잔을 주지 않는다. 비록 길을 잃는다 해도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하여 기어코 목적지에 도착해야 끝이 나는 것이 내비게이션이다. 그러므로 처음 가는 길도 내비게이션과 있으면, 두렵지 않다.

우리 하나님의 성품이 마치 내비게이션과 비슷하다. 짜증도 내시지 않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다시 가르쳐 주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다.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진정한 안내자는 오직 성경 말씀이시다.

* 성경 말씀대로 살자

우리는 오직 성경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일이나. 나의 모든 삶이 성경적이어야 한다. 만약의 나의 삶이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라면 가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대로 살 때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된 복을 받는다. 성경은 우리의 보배다. 성경 말씀 속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인생의 본분이 무엇인지? 구원받는 비결이 무엇인지? 복 받는 비결이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천국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인생의 모든 해답이 기록된 보배 중에 보배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고집이나 내 주장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개혁이다.

 

2. 오직 그리스도

*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인간은 어떤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 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4: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셨다. 이 말씀과 같이 지구상에 구세주로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다. 석가모니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자기가 구세주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14: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 구원의 과정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만 가능하다. 5:9절에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 면죄부는 성경적이 아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그 당시에 카톨릭에서는 로마의 바티칸 성당 건축을 위한 헌금 모금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 면죄부를 사면 죄를 사함 받아서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 루터에게는 이것이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루터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내걸게 되었다. 그날이 15171031일이었는데 할로윈 축제 전날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이 다음날 아침에 교회에 나올 것을 알고 그들에게 알리려는 의도였다.

*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다.

이때에 루터가 외친 핵심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인, 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이었다. 그렇다 구원이란 오직 구세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이지 속죄를 위한 면죄부를 돈을 주고 살 때 구원이 임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만 구원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나 다른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완전 잘못된 생각이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라는 원리로 개혁되어야 한다.

 

3. 오직 은혜

* 값없이 주시는 은혜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효력을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인간 쪽에서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믿음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믿음은 구원의 은총을 받는 통로역할을 할 뿐이다.

* 행위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

딤후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만일에 행위의 대가로 구원을 받는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죄인인데 그의 행위가 오죽하겠는가? 인간이 잘 하는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뿐인데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받기위하여 고행을 하며 업적을 쌓으려고 많은 노력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타력(他力(타력) 즉 주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다.

* 어떤 은혜인가?

선택의 은혜, 부르심의 은혜, 용서(속죄)의 은혜, 긍휼의 은혜, 기도할 수 있는 은혜, 찬송할 수 있는 은혜, 헌신할 수 있는 은혜, 돌보심의 은혜, 보호와 인도의 은혜, 견인의 은혜, 성화(聖化)의 은혜, 영화(榮化-부활)의 은혜, 이같이 한량없는 은혜를 받는 우리다.

딤전 1:14절에 보면,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정말 넘치도록 은혜를 받았다.

*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고전 15:1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였다. 그렇다 오늘 내가 나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다.

*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은혜

우리는 거절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다. 내가 나 된 것이 다 주의 은혜로 된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절대로 교만하거나, 건방지거나, 거만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오직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욱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불가항력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아니하고, 또는 깨닫고도 감사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나의 의로움이나 나의 공로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은혜가 회복되어야 한다. 오직 은혜! 로 돌아가야 한다.

 

4. 오직 믿음

*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

금보다도 더 귀한 것이 믿음이다. 금으로는 믿음을 살 수 없으나 믿음이 있으면 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은 없어질 수도 있고, 도둑을 맞을 수도 있으나 믿음은 영원하다.

벧전 1:7절에 보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 믿음으로 통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와 복은, 금과 같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나 어떤 자격에 의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하여 주신다.

그러나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에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과 전혀 상관없고 믿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었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에서 면죄부를 팔았다. 면죄부는 죄를 면하게 해주는 증서로서 이 증서를 산 헌금이 헌금함에 땡그랑 떨어지는 순간에 부모, 형제,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혼이 연옥에 있다가 천국으로 간다고 하였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성당을 건축하고 있었는데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면죄부를 팔게 된 것이었다. 그때 마틴 루터는 회개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도 없이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이다.

* 황금만능주의

지금 이 시대도 돈이면 다 된 다는 황금만능주의가 세상에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도 서서히 불고 있어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고, 성도들이 병들어 세속화 되어가고 있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금 황금에 속고 있다.

* 1950년대 우리나라에 유명한 부흥사 박재봉 목사님이 계셨다. 그분이 일제 말엽 금강산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한 젊은이가 관광차 금강산에 들어왔기에 그 청년을 붙잡고 전도를 했다.

젊은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야지.”라고 전도를 했더니 씨도 안 먹히지 않는 것이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지식과 돈과 과학이면 만능입니다. 세상에는 돈과 지식과 과학만 있으면 다 됩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목사님, 오셔서 기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여 그 청년을 따라가 봤더니 몇 달 전 전도하려고 했던 그 사람이 피를 많이 흘려서 창백한 얼굴로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목사님은 기도는 무슨 기도? 하나님이 있어야 기도하지.” 하시고는 사각모를 씌워 주면서 지식이면 되잖아?”, 돈을 손에 쥐어주며 돈이 만능이라며?”, 또 약병을 주며 과학이면 다 되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청년이 아닙니다, 목사님. 지금 내 앞에는 지옥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청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일화가 있다.

세상 떠날 때 사각모가 필요한가? , 지식, 과학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 본문 1: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듯이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

*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하기 전에는 믿음에 의한 심한 갈등을 하였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부친의 소원대로 법학도의 길 을 가고자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떨어진 낙뢰로 친구가 죽었다. 큰 충격을 받은 루터는 법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1505년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교회의 교리와 계명과 수도의 규칙들을 철저히 배워서 1507년에 신부가 되었고, 1510년 그의 나이 30세 때에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신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영혼을 괴롭히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로마 여행이 자기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4주간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의 여러 곳 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라테란 성당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거룩한 계단이라고도 불리는 28개의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

단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 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 있던 계단이라고 하여 빌라도의 계단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교황청은 이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져 왔으며, 누구든지 맨 무릎으로 그 계단을 기어오르는 수행을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자신의 죄가 사하여지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영적인 답답함은 여전했다. 그렇게 엄격한 규율

을 지키고 선행을 행하고 심지어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는 고통스런 수행을 해도 영혼의 답답함은 해결되지 않았다. 28번째의 마지막 계단에 섰을 때 오히려 이것이 정말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진실한 진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수행이 부족하여 그런 줄 알고 더욱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며 수도에 전진하였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내면의 죄 성 만 드러나고 영적인 갈증은 더욱 심해지며 영혼의 만족이 없었다.

* 루터의 결단

루터가 어느 날 로마서를 읽던 중에 117절의 말씀이 그의 영혼을 흔들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말씀은 그의 영혼에 생수와 같았고 영혼의 찬란한 햇빛과도 같이 비치었다. 그의 영혼은 자유하게 되었고 말할 수 없는 큰 평안과 기쁨이 임하였다.

복음의 핵심인 오직 믿음의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경험한 그는 15171031,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교황청 교리의 오류를 지적하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게시하였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게 되었고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가 세워졌다.

* ’오직 믿음이란 성도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진다는 말씀이다.

이미 바울 사도가 언급한 것처럼 율법을 지키기 위한 고행이나 종교적 선행으로 얻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20절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로마서 1010절에 의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다. 누구든지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의 어떤 행위가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치는 행위 종교이며 사람의 노력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행위종교다. 그래서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선행을 가르치고 교훈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같이 다 부패하고 범죄하여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로마서 310-12절에서 하나님은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였다. 인간은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서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당하고 형벌 받을 존재들이다.

모두가 다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만큼 선해질 수 없으며 아무리 많은 선행으로 공덕을 쌓는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만큼 쌓을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다.

하나님을 창조의 주님으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고 영접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어 구원에 이르는 구속의 종교, 은혜의 종교다.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에베소서 29절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하여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언급하셨다. 그래서 이 믿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믿어지는 믿음이라고 한다.

만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스스로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이 알게 해주셔야 알 수 있고(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믿게 해주셔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는 갈라디아서 11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은 영혼에게 복음이 들려질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이 믿어지게 하신다.

사도행전 1614절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고 따르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48절에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믿음이 부어진다. 이렇게 구원 얻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인 것이다.

*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어야 한다.

오직 믿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자칫 잘못하면 행위를 무시하기가 쉽다. 사실상 루터를 비롯한 초기 개혁자들은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위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신앙과 행위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야고보서 222절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했고 야고보서 224절에서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삶이 필요하다. 그리고 행함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행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갔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 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으며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하여 주셨다. 이제 말뿐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한다면 사랑의 행위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 본질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은 어떤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본래의 신앙을 되찾는 운동이었다. 즉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중세 로마 천주교회의 변질을 안타까워하여 본질로 돌아가고자 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슬로건 중에 하나는 본질로 돌아가자!’‘근원으로 돌아가자!’

였다. 그들이 추구한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이었다. 우리 신앙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교부들의 신학이다. 왜 그럴까? 교부들은 사도들 이후에 등장했다. 그래서 이들을 속사도(續使徒)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를 지키며, 교리와 신학을 정립한 분들이다. 이들은 교회가 내적 갈등이나 이단과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바른 가르침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했고, 외적으로 박해가 임할 때에는 순교의 모범을 보였다. 그리하여 사도들의 생생한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중세 천주교회는 이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있었다. 마리아 숭배, 성자숭배, 성물 숭배 등 온갖 미신 덩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10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중세교회 는 점차 부패하여 성경의 권위는 상실되고, 사람이 만든 전통에 집착하였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 대신에 면죄부를 발행하였다. 이런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고 교부들의 신학에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 이지 중세교회의 전통이 아니다. 칼빈도 그래서 성경을 원어로 많이 연구했고, 교부들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다.

그런데 그 본질로 돌아가는 것 중에 하나가 오직 믿음이었다. 오직 믿음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그것은 중세의 로마 천주교회가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오직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질을 왜곡시킨 변질이었다. 이런 공로주의는 비성경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5. 오직 주 만 영광 받으심

*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는 바르지 못함과 미성숙에서 비롯된 많은 실수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들이 가로채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일까? 하나님이 누구 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잘못 알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창세기 1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낮과 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절대주권자이시다. 모든 영역의 하나님이시다.

* 그러므로 인간에게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4:11절에 보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으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1:19-23)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은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늘과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절대주권자이시다. 모든 영역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로렌스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이 있다. 로렌스는 신학자도 아니고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도 아니다. 166655세가 되던 해에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칼멜 수도원에 평신도 수도사로 입회하여 수도원 부속병원의 부엌 취사장에서 일하며 25년을 보내고 80세에 세상을 떠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로렌스를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을 발견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 후반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에게는 일하는 때나 기도하는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부엌일을 하면서도 나는 마치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일을 감당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다. 취사장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거룩한 일임을 알고 기뻐하며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이것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 나는 어떤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가정에서의 가사일, 직장에서 주어진 일, 사업장의 일,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감당하는 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그 일을 주님의 일로 알고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일이다.

* 사람들은 좋은 직장과 그렇지 않은 직장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월급을 많이 주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직장은 좋은 직장으로, 그렇지 않은 직장은 좋지 않은 직장으로 여긴다. 그리고 소위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하고, 상대적으로 알아주지 않는 직장에 들어가면 복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잘못된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죄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모든 일이 다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직장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일로 알고 기쁨과 최선으로 감당해야 한다.

*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이른 새벽마다 길거리를 청소하는 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왜 새벽마다 거리를 청소하는 것입니까?” 첫 번째 사람이 대답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살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좀 더 나은 직업을 얻기까지 기반을 닦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는 어떤 자세로 일하고 있는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일로 알고 기쁨으로 최선을 다해 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라.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이요,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라.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 우리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 한 분만이 받으실 수 있다. 결국 우상 숭배라는 것은 그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궁극의 이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가장 무서운 죄악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다.

42:8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반면에, 43:7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고 하셨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

*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외롭게 투쟁한 루터를 보라.

평범한 신부에 불과한 루터가 이런 주장을 하면서 절대 권력이었던 교황청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로마가톨릭은 루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하고 달래 보기도 했다.

너의 주장을 취소해라. 그러면 너를 승진시켜 주겠다.” 그러나 루터는 그런 것에 회유당하지 않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오히려 더 교황청의 잘못을 지적하며 오직 믿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이제는 무섭게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너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추방해버리겠다. 일개 수도사에 불과한 네가 감히 로마 교황청에 도전을 하다니! 너는 완전히 파면이고 추방이다! 너는 이제 발붙일 곳도 없으리라.” 교황청에서는 독일의 국왕과 보름스 국회에까지 압력을 넣어 거기서도 루터를 파면시키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교황청은 최후로 루터가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정말로 파면할 뿐만 아니라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교황이 직접 칙령을 써서 내려 보냈다.

그러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교황의 훈령과 칙령을 불로 태워 버리고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하나님이 두렵지 당신들이 두렵지 않다. 당신들이 나를 죽인다고 하여도 두렵지 않다. 나의 목숨은 로마 교황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하여 평상시에 즐겨 불렀다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을 우렁차게 불렀다.

이렇게 되자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일급 지명수배자가 되어 언제든지 잡히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루터도 사람인지라 너무 현실이 암담하였다. 자기가 아무리 개혁을 외쳐도 로마 교황청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가 어느 날 상심하여 큰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는 루터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의 아내가 캄캄한 밤에 검은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고 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왜 이렇게 늦은 밤에 상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오?” 그러자 카타리나가 우리 하나님이 죽어 버렸어요.”라고 대답했다. 루터는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돌아가실 수 있단 말이오. 누가 감히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러자 카타리나가 말하길 여보, 만일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던 당신이 이렇게 한숨만 푹푹 쉬고 있겠어요? 하나님이 죽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요?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당신이 그렇게 실망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루터가 이렇게 말하며 힘을 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죽긴 왜 죽어요? 내가 잠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을 바라봤소. 이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겠소.” 이런 지혜로운 아내의 격려와 영적인 지지로 루터는 다시 일어나 담대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붙잡았다. 이렇게 루터는 아주 외롭게 싸웠다. 홀로 고독하였지만 당당하게 싸웠다. 그 후에 칼빈이 등장하고 녹스와 츠빙글리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그의 뒤를 이으며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화산같이 타올라 오늘의 개신교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 주신다.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한국 교회를 개혁시키자는 어떤 도발적인 생각보다는 우리 모두가 조용하게, 스스로 나부터 개혁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자기개혁을 한다면 그것이 곧 한국교회의 개혁이다.

오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주께 영광! 이라는 이 다섯 가지의 중심 주제를 가지고 날마다 개혁하는 삶을 살자.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셨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신다. 보혜사 성령께서도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이 시간도 우리를 돕고 계신다.

 

(금주 설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본인이 속해있는 대한예수고 장로회(합동)

총회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오직 복음개혁을 외치다라는 특집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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